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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량소년과 그리스도
사카구치 안고
벌써 열흘째, 이빨이 아프다. 왼 볼에 얼음을 올리고, 즈루폰제 1를 마시고, 누워 있다. 누워있고 싶지는 않으나, 얼음을 올리면, 누워있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다. 누워서 책을 읽는다. 다자이의 책을 대강 다시 읽어보았다.
진통제 세 통을 비웠으나, 진통이 멎지 않는다. 어쩔 수 없이, 의사에게 갔다. 전혀 나아지지 않는다.
“예에, 대부분, 알겠습니다. 제가 말씀드릴 것도, 진통제를 마시고, 얼음주머니를 올린다, 그것 뿐입니다. 그게 무엇보다, 괜찮을 겁니다.”
이쪽은, 그것만으로는, 괜찮지 않다.
“곧, 나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이 젊은 의사는, 완벽한 말을 사용한다. 곧, 나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인가. 의학은 주관적 인식의 문제인가, 약물의 객관적 효과의 문제인가. 어쨌거나, 이쪽은, 이빨이 아프단 말이다.
원자 폭탄으로 백만 명 일순에 때려 눕혀봤자, 겨우 한 명의 치통을 멎게 할 수 없으면, 무어가 문명이냐. 바보 자식.
아내가 진통제의 빈 병을 세로로 세우려고 하다가, 짤깍 쓰러트린다. 소리가, 펄쩍 뛸 정도로 울렸다.
“이런, 바보 같은 놈!”
“이 유리병은 세울 수 있어.”
상대편은, 곡예를 즐기고 있었다.
“당신은, 바보라서, 싫어.”
아내의 얼굴색이 바뀐다. 분노, 골수에 사무친 것이다. 이쪽은 고통이 골수에 사무치고 있다.
푹, 하고 단도를 볼에 찌른다. 에잇 하고 파낸다. 기분, 좋아지지 않는다. 목에 멍울이 생겼다. 그곳이, 쑤신다. 귀가 아프다. 머리도, 전기와 같이 지끈지끈하다.
목을 매어라. 악마를 없애라. 퇴치하라. 나아가라. 지지 마라. 싸워라.
어느 삼류 문사 2는, 치통의 탓에, 결국, 목을 매어 죽으리. 결사의 안색, 무시무시하여라. 투지는 충분하니. 위대.
칭찬은, 해주지 않겠지. 아무도.
이빨이 아프다, 따위의 일은, 현재, 이빨이 아픈 인간 이외의 누구도 동감해주지 않는다. 인간 모독! 하며 화를 내봤자, 치통에 동감해주지 않는 것이 인간 모독일까. 그렇다면, 치통 모독. 괜찮잖아요. 치통 정도는. 이런, 이런. 이빨이란, 그런 것이었나요. 신新발견.
겨우 한 명, 긴자 출판의 升金編輯 부장이라는 희한한 인물이, 동정을 표해주었다.
“음, 안고 씨. 틀림없이, 이빨은 아프지요. 이빨의 병과 생식기의 병은, 같은 종류의 음울함이죠.”
말은 잘한다. 정말, 우울함이 담겨있다. 그렇게 따지면, 차금借金도 같은 종류겠지. 차금은 음울한 병이요. 이것을 퇴치하고자 하고자 하나, 사람의 힘이 미치지 않으니. 아아, 슬프다, 슬프다.
치통을 참으며, 씨익, 웃는다. 조금도, 대단하지 않거든. 이 바보 자식.
아아, 치통에 울며. 걷어 차버린다. 이 바보 같은 놈.
이빨은, 몇 개 있는가. 이게, 문제다. 사람에 따라, 이빨의 수가 다를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그렇지 않더라고. 이상한 곳까지, 닮게 해 놨어. 그렇게까지, 하지 않아도, 되잖아. 그러니까 나는, 하느님이 싫어. 어쩌자고, 이빨의 수까지, 똑같이 해 놓은 걸까. 미친놈. 정말 그렇다니까. 이런 꼼꼼한 방법은, 미친놈이나 하는 짓이야. 더, 순진하게 하란 말이다.
치통을 참으며, 씨익, 웃는다. 씨익 웃으며, 사람을 벤다. 입을 다물고 앉으면, 가만히, 낫는다. 약손이다. 과연, 분명 신자가 모일 것이다.
짐은, 치통에 의해, 열흘 간, 짜증을 내었으니. 아내는 친절하였노라. 머리맡에서 시중을 들며, 놋대야에 얼음을 넣고, 수건을 짜, 오 분 간격으로 짐의 볼에 바꾸어 올려 주었나니. 분노가 골수에 사무쳐도, 내색하지 않고, 정숙, 여자의 본보기였도다.
열흘째.
“다 나았어?”
“음. 다소, 나아졌어.”
여자라는 동물이, 무얼 생각하고 있는지, 그건 입만 잘 놀리는 사람에게는, 알 수가 없어. 아내, 곧바로 안색을 바꾸며,
“열흘간, 나를 괴롭혔겠다.”
짐은 후려 맞으며, 걷어차였노라.
아아, 짐이 죽으면, 아내 곧바로 안색을 바꾸며, 일평생, 나를 괴롭혔겠다, 하고 짐의 시체를 때리며, 목을 조를 테지. 곧바로, 짐이, 되살아나면 재미있을 텐데.
단 카즈오, 찾아오며. 품에서 비싼 담배를 꺼내며, 가난하면 사치를 부리게 된다, 듬뿍 돈이 있으면, 이천 엔의 마는 담배 3를 산다, 고 중얼대면서도, 짐에게 한 개피 주었나니.
“다자이가 죽었네요. 죽었으니까, 장례식에는 가지 않았어.”
죽지 않는 장례식이, 있을까 보냐.
단은 다자이와 같이 공산당의 세포인가 하는 생물활동을 했던 적이 있었다. 그때 다자이는, 생물의 두목 격으로, 단 카즈오의 말에 따르면 일당 중에서도 가장 성실한 당원이었다고 한다.
“뛰어든 곳이 우리 집 근처였으니까, 이번엔 정말 죽었다고 생각했어.”
단 선인이 신시神示를 베풀어, 거듭, 말하기를, "또 장난을 쳤네요. 어째서인지 장난을 친단 말이에요. 죽은 날이 13일, 굿바이가 13회 째, 이것도, 저것도, 13…….“
단 선인은 13을 죽 나열했다. 전혀 눈치를 채지 못하고 있었으니, 나는 어안이 벙벙했다. 선인의 안목이었다.
다자이의 죽음은, 누구보다도 빨리, 내가 알았다. 아직 신문에 나지 않았을 적, 신초新潮의 기자가 알리러 왔었다. 그것을 듣고, 나는 즉각 편지를 남기고 모습을 감추었다. 신문, 잡지가 다자이의 일로 습격해올 것이라고 직감으로 알았기에, 다자이의 일은 당분간 얘기하고 싶지 않으니까, 라고 찾아올 기자 양반들에게, 써 남기고, 집을 나왔다. 이것이 잘못의 시작이었다.
신문기자는 내 편지의 일자가 신문기사보다 빨랐기에, 수상해 하였다. 다자이의 자살이 광언이고, 내가 그 둘은 숨기고 있는 것이라 생각하는 것이다.
나도, 처음엔, 살아있는 게 아닐까, 하고 생각했다. 그러나, 강변에, 미끄러져 떨어진 자국이 분명히 남아있었기에, 그렇다면 정말로 죽었겠노라 생각했다. 미끄러져 떨어진 자국까지 장난을 칠 수는 없다. 신문기자는 소인의 제자로 들어와 추리소설을 공부하도록.
신문기자의 착각이 정말이었다면, 정말, 좋았을 텐데. 1년 정도 다자이를 숨겨놓고, 슬쩍 되살린다면, 신문기자나 양식良識이 있는 사람은 버럭 화낼지 모르지만, 가끔은 그런 일이 있어도, 괜찮지 않은가. 정말로 자살한 것보다, 광언자살을 계획할 정도만의 장난을 칠 수 있었다면, 다자이의 문학은 더욱 뛰어난 것이 되었겠지, 하고 나는 생각한다.
블런든 씨는, 일본의 문학자들과는 다르게 안목이 있는 사람이다. 다자이의 죽음에 관하여(시사 잡지) 문학자가 멜랑콜리만으로 죽는 일은 적다, 대개 허약에게서 궁지에 몰린 것으로, 다자이의 경우도 폐병이 한 원인인 것은 아닌가, 라는 설이었다.
아쿠타가와도, 그렇다. 중국에서 감염된 매독이, 귀족 취미의 이 사람을 벌벌 떨게 한 것은 아닌가 생각된다.
다자이는, M・C, 마이・코미디언, 을 자칭하며, 아무리 하여도, 완전히 코미디언이 될 수가, 없었다.
만년의 것으로는, ――아무래도, 안 된다. 그는 ‘만년’이라는 소설을 썼는데, 복잡하게 뒤엉켜서, 안 된다. 이 죽음에 가까운 시기의 작품에 있어서는(뭐라고 말해야 할지 잘 모르겠네) ‘사양’이 가장 뛰어나다. 다만 10년 전의 ‘어복기魚服記’(만년에 수록되었다)는, 놀랍지 않은가. 이것이야말로, M・C의 작품입니다. ‘사양’은, 거의, M・C이지만, 아무리 하여도 완전히 M・C가 되지 못했으니까.
‘아버지’라느니 ‘앵두’라느니, 괴로워. 그걸 사람에게 보여주면, 안 되는 건데. 그건 숙취의 중에만 있으며, 숙취 중에 처리해야만 하는 성질의 것이다.
숙취의, 혹은, 숙취적의, 자책이나 후회의 괴로움, 슬픔을, 문학의 문제로 하면 안되고, 인생의 문제로 하여도 안 된다.
죽음에 가까울 시기의 다자이는, 너무나도 숙취적이었다. 매일을 아무리 숙취로 있었다고 해도, 문학이 숙취여서는, 안 된다. 무대에 오른 M・C에게 숙취는 용서되지 않아. 각성제를 과하게 먹어도, 심장이 폭발해도, 무대 위의 숙취는 막지 않으면 안 된다.
아쿠타가와는, 어쨌거나, 무대의 위에서 죽었다. 죽을 때도, 조금, 배우였다. 다자이는, 13의 숫자를 뒤틀거나, 인간실격, 굿바이와 시간을 들여 줄거리를 만들어, 각본대로 하며, 결국, 무대의 위가 아닌, 숙취적으로 죽어버렸다.
숙취를 없애면, 다자이는 건전하고 정연한 상식인, 즉, 성실한 인간이었다. 코바야시 히데오가, 그렇다. 다자이는 코바야시의 상식성을 비웃었으나, 그것은 착각이다. 정말 올바르고 정연하지 않은 상식인이 아니면, 진정한 문학을, 쓸 수 있을 리가 없다.
올해의 1월 며칠이었던가, 오다 사쿠노스케의 일주기에 술을 마셨을 때, 오다 부인이 두 시간 정도, 늦게 왔다. 그때까지 좌중은 크게 취해 있었으나, 누군가가 오다의 몇 명인가 숨겨둔 여자의 이야기를 시작했기에,
”그런 얘기는 지금 해버려. 오다 부인이 오면, 하지 말고.“
라고 말하니,
”그래, 그래, 정말 그래.“
라고 즉각, 큰소리로 맞장구를 친 것이 다자이였다. 선배를 방문할 때는 하카마를 입는, 다자이는, 그런 남자였다. 건전하고, 정연하고, 진짜 인간이었다.
다만, M・C가 되지 못하고, 어찌하여도 숙취적이 되어버리고는 했다.
인간, 살아가는 한 부끄러움 많으니. 다만, 문학의 M・C에는, 인간의 부끄러움은 있으나 숙취의 부끄러움은 없다.
‘사양’에는 이상한 높임말이 너무나도 많다. 도시락お弁当을 방お座敷에 까시고 가져오신御持参 위스키를 마시시며お飲みになり, 라는 상황에, 그렇구나, 하고 생각하자, 와다 숙부가 기차에 타니 기분이 좋은 듯 노래를 흥얼거렸다, 처럼, 아무래도 귀족의 진부한 판에 박힌 형식으로, 작자라는 건, 이런 부분에 문학의 진정성의 문제는 없으니 아무렇지 않아야 할 터인데, 실제로, 숙취적으로 누구보다 얼굴을 붉히는 것이, 그런 부분이다.
정말, 이렇게 얼굴을 붉히는 건 무의미하고, 문학에서, 대단찮은 것이다.
그런데, 시가 나오야라는 인물이, 이것을 집어 들어, 해치운다. 즉, 시가 나오야라는 인물이, 얼마나 문학자가 아닌지, 단순히 문장가에 지나지 않는다, 라는 것이, 이것에 의해 밝혀지는 것이나, 그런데, 이것이 또, 숙취적으로는 가장 급소를 찌른 것으로, 다자이가 얼굴을 붉히고 혼란하게 하여, 욱하게 했음이 틀림없다.
원래 다자이는 우쭐해지면, 숙취적으로 입을 놀려버리는 남자로, 그 자신이, 시가 나오야의 ‘죽임お殺し’이라는 높임말이, 꼴사납다고 하며, 달려든다.
대체로, 이런 부분에는, 다자이가 가장 숨기고 싶어 하는 비밀이 있었다, 고 나는 생각한다.
그의 소설에는, 초기의 것부터 시작하여, 자신이 좋은 집안의 출신이라는 것이, 너무나도 많이 쓰여 있다.
그런 주제에 그는, 카메이 카츠이지로가 작품 주에서 스스로가 명문의 자제임을 말하니, 켁, 명문, 웃기지 마, 명문 따위, 추잡한 단어, 그렇게 말했으나, 왜, 명문이 이상한 것인가, 즉 다자이가, 그것에 집착하고 있었던 것이다. 명문의 이상함이, 즉 다자이가, 그것에 집착하고 있었던 것이다. 명문의 이상함이, 금세 영향을 주는 것이다. 시가 나오야의 ‘죽임お殺し’도, 그것이 그에게 영향을 주는 의미가 있었겠지.
프로이트의 ‘오류의 정정’이라는 게 있다. 우리가, 무심코 말실수를 했을 때, 그것을 정정하는 의미로, 무의식적으로 유사한 잘못을 하여, 합리화하려는 것이다.
숙취적이고 쇠약적인 심리에서는, 특히 이것이 심해져서, 얼굴을 붉히고 욱함적 혼란고통赤面逆上的混乱苦痛과 함께, 오류의 정정적 발광상태誤謬の訂正的発狂状態가 일어나는 것이다.
다자이는, 이것을, 문학에서 하였다.
생각하면 다자이는, 그 젊었을 때부터, 가출을 하고 여자에게 신세를 졌을 때처럼, 양가의 자제, 때로는, 귀족의 자제 정도의 부분을, 신경 썼던 때도 있었겠지. 그 방법으로, 술집을 속이고, 돈을 계속하여 빌리는 일도, 있었을지도 모른다.
숙취적으로 쇠약해진 마음에는, 긴 일생 그마다의 수많은 부끄러움이 얼굴을 붉히고 욱함적으로 그를 고통스럽게 했음이 틀림없다. 그리고 그는, 그 소설에서, 오류의 정정을 저질렀다. 프로이트의 오류의 정정이란, 오류를 솔직히 정정하는 것이 아닌, 다시 한번, 유사한 오류를 저지름으로써, 정정의 앞뒤를 맞추려고 한다는 의미다.
생각건대, 솔직한 오류의 정정, 즉, 선한 건설에게로의 적극적인 노력을, 다자이는 하지 않았다.
그는, 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 동경이나 양식良識은, 그의 언동에 넘쳤다. 다만, 할 수 없었다. 그곳에는, 분명히, 허약의 영향도 있다. 다만, 허약에게 책임을 지우는 것은 올바른 도리가 아니다. 확실히, 그가 안이했던 탓이었다.
M・C가 되기 위해서는, 숙취를 죽이려 들려는 노력이 필요하나, 숙취의 비탄에 빠지는 것은, 노력을 적게 하여도 되기 때문이다. 다만, 왜 안이했는가, 역시, 허약으로 돌아가야 하는지도 모른다.
예전에, 다자이가 씨익 웃으며 다나카 히데미츠에게 교훈을 주었다. 팬레터는 귀찮아하지 말고, 답변을 써, 고객님이니까 말이야. 문학자도 상인이야. 다나카 히데미츠는 이 교훈에 따라, 부지런히 답변을 쓰는 듯하지만, 다자이가 부지런히 답변했는가, 그다지 쓰지도 않았겠지.
그러나, 어쨌거나, 다자이가 꽤나 팬에게 서비스를 하는 것은 사실로, 작년에 내가 있는 곳에 카네사와인가 뭔가 하던 책방의 아저씨가, 화첩(인지, 뭔지, 안을 열어보진 않았으나, 꽤 두꺼웠었다)을 보내오며, 몇 자 적어달라고 하였다. 보따리를 풀지 않고, 내버려 두었더니, 가끔씩 독촉을 오며, 머지않아 이건 매우 비싼 종이를 무리해서 산 것으로, 벌써 누구누구 씨, 누구누구 씨, 누구누구 씨, 다자이 씨도 써 주었다, 짐은 자네 사카구치 선생의 인격을 신용하고 있노라, 라는 이상한 것이 쓰여 있었다. 기분이 언짢을 때였기에, 나도 짜증이 나서, 이상한 이유를 붙이지 마라, 바보 같은 놈, 하고 보따리를 그대로 되돌려 보냈더니, 이 미친놈, 하고 화를 내는 답장이 온 적이 있었다. 그때의 엽서에 의하면, 다자이는 그림을 그리고, 그것에 글을 더해주었던 듯하다. 대단한 서비스라고 할 수 있다. 이것도, 그의 허약에서부터 온 것이라고 나는 생각하고 있다.
대체로, 여배우 남배우는 둘째 치고, 문학자와 팬, 이라는 건 일본에도, 외국에도, 그다지 화제가 되지 않는다. 애당초, 현세적인 배우라는 직업과는 다르게, 문학은 역사성이 있는 직업이므로, 문학자의 관심은 현세적인 것과는 거리가 멀어지는 것이 당연하며, 발레리를 시작하여 숭배자에게 둘러싸여 있었다는 말라르메도 그렇고, 목요회의 소세키도, 팬이라기보다는 문하생으로, 일단 재능의 자격이 전제된 관계였겠지.
다자이의 경우에는, 그런 게 아니라, 영화의 팬과도 같은 것으로 이런 부분은, 아쿠타가와와도 닮은 부분이 있다. 나는 그것을 그들의 육체의 허약에서 온 것으로 본다.
그들의 문학은 본래 고독의 문학으로, 현세적, 팬적인 것과 관계가 되는 부분은 없을 터인데, 즉, 그들은 무대 위에서 완전히 M・C가 되는 강인함이 부족하여 그 약함을 현세적으로 보충하게 된 것이리라 나는 생각한다.
결국은 그것이, 그들을 죽음에 몰아넣었다. 그들이 현세를 내치고 있었다면, 그들은, 자살은 하지 않았다. 자살했을지도, 모른다. 다만, 어쨌거나 더 강인한 M・C가 되어 더욱 뛰어난 작품을 썼겠지.
아쿠타가와도, 다자이도, 그들의 소설은, 심리에 정통하고 인간에게 정통한 작품으로, 사상성은 거의 없다.
허무라는 것은, 사상이 아니다. 인간 그 자체에 부속된 생리적인 정신 내용이며, 사상이라는 것은, 더욱 바보 같은, 경박한 것이다. 그리스도는 사상이 아닌, 인간 그 자체다.
인간성(허무는 인간성의 부속품이다)은 영원불변의 것으로, 누구나의 것이나, 개인이라는 것은, 오십 년밖에 살지 못하는 인간이고, 그 점에서, 유일하게 특별한 인간이며, 누구나와는 다르다. 사상이란, 이 개인에게 속하는 것으로, 그러므로, 살아가고, 또한, 멸망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원래, 경박한 것이다.
사상이란 개인이, 어쨌거나, 자신의 일생을 소중히, 더 잘 살기 위해서 궁리를 하고, 필사적으로 짜낸 방안이지만, 그러니까 또한, 인간, 죽어버리면 그것뿐이야, 안달하지 마, 라고 말해버리면, 거기까지다.
다자이는 그걸 알고 있어서, 그렇게 단언할 수도 없었다. 그런 주제에, 더 잘 살기 위한 공부를 계획하며, 풋내 나는 사상을 두려워하지 않고, 바보가 되는 것은 더욱이, 할 수 없었다. 다만, 그걸 다 알면서 냉담히, 인생을 백안시하여도, 조금도 구제받지 못하며, 훌륭하지도 않다. 그걸 다자이는, 싫을 만큼, 알고 있었을 게 분명하다.
다자이의 이런 ‘구제받지 못할 슬픔’은 다자이의 팬이라고 하는 것들에게는 알 수 없다. 다자이의 팬은, 다자이가 냉담히, 백안시, 풋내 나는 사상이나 인간들의 발버둥질을 냉소하며, 숙취적인 자학작용을 보여줄 때마다 갈채했다.
다자이는 숙취적으로는 있고 싶지 않다고 생각하여, 누구보다도 그걸 저주하고 있었을 테다. 아무리 풋내가 난다고 해도 상관없다, 유치해도 좋다, 더 잘 살기 위해서, 세간적인 선행이든 뭐든, 필사적으로 공부하여, 나은 인간이 되고 싶었을 테다.
그렇게 되지 못하게 한 건, 갖가지 그의 허약이다. 그리고 그는 현세의 팬에게 영합하여, 역사 속의 M・C가 되지 않고, 팬만을 위한 M・C가 되었다.
‘인간실격’, ‘굿바이’, ‘13’따위, 추잡하긴, 켁. 다른 사람이 그것을 했다면, 다자이는 분명히, 그렇게 말했을 터이지 않은가.
다자이가 덜 죽어서, 되살아난다면, 언젠가는 숙취적으로 얼굴을 붉히며 욱하는, 대혼란, 고민 끝에 ‘인간실격’, ‘굿바이’ 자살, 추잡하긴, 켁, 분명히 그런 것을 썼을 것이다.
다자이는 때때로, 진짜 M・C가 되어 빛이 빛나는 듯한 작품을 썼다.
‘어복기’, ‘사양’, 그 외, 예전에 쓴 것에도, 몇 개인가 있으나 최근의 것에도 ‘남녀동권’이나 ‘친우교환’과 같은 가벼운 것도, 훌륭하다. 당당하며 우러러볼 만한 M・C이며, 역사 중의 M・C의 모습이다.
그러나, 그것이 지속되지 못하고 아무리 하여도 숙취의 M・C가 되고 만다. 그곳에서 회복되어, 진짜 M・C로 돌아간다. 그리고, 숙취의 M・C에 돌아간다. 그걸 반복한 모양이다.
다만, 그럴 때마다 말하는 법이 뛰어나지며, 더 좋은 화자가 되고 있다. 문학의 내용은 변하지 않는다. 그것은 그가 인간에게 정통한 문학이며, 인간성의 근본적인 문제만을 취급하고 있으니까, 사상적인 생성변화가 보이지 않는 것이다.
이번에도, 자살을 않고, 다시 일어나 역사 속의 M・C이 다시 되었다면, 그는 더욱 뛰어난 화자가 되어 아름다운 이야기를 서비스했을 터였다.
대체로, 숙취적 자학작용은, 알기 쉬운 것이므로 너무 심각한 청년의 갈채를 받는 것은 당연하지만, 다자이 정도의 높은 고독한 영혼이, 숙취의 M・C에 끌려 내려가기 십상이었던 건, 허약이 일으킨 부분, 그리고, 또 하나, 술이 일으킨 부분이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블런든 씨는 허약을 꿰뚫어 보았으나, 나는 한 가지 더, 술, 이 지극히 통속적인 마물을 더한다.
다자이의 말년은 숙취적이었으나, 또한, 실제로, 숙취라고 하는 지극히 통속적인 것이 그의 높은 고독한 영혼을 갉아먹고 있었다고 생각한다.
술은 거의 중독을 일으키지 않는다. 이전, 어느 정신과 의사의 말에 의하면 특히 일본에는 진성 알코올 중독이라는 것이 거의 없는 이유라고 한다.
그러나, 술을 마약이 아닌, 요리의 일종이라 생각한다면 큰 착각입니다.
술은, 맛있는 게 아닙니다. 나는 어떤 위스키도 꼬냑도, 숨을 죽이고, 겨우 넘기고 있다. 취하기 위해서, 마시는 겁니다. 취하면, 잠들 수 있습니다. 이것도 효능의 하나.
그러나, 술을 마시면, 아니, 취하면, 잊습니다. 아니, 다른 사람이 탄생합니다. 만약, 자신이라는 것을 잊어버릴 필요가 없었다면, 구태여, 이런 걸, 나는 마시고 싶지 않다.
자신을 잊고 싶다, 거짓말하지 마. 잊고 싶다면, 매일같이 술을 마시고, 취해라. 이걸 퇴폐라고 칭한다. 억지 이론이라고 말해서는 안 된다.
나는 살아있다고. 아까 말했듯이, 인생 오십 년, 뻔하지, 그렇게 말하는 게, 너무 쉬우니까, 그렇게 말하고 싶지 않다고 말하고 있잖아. 유치해도, 풋내 나도, 진흙투성이라도, 어떻게든 살아있는 증거를 남기려는 마음가짐을 갖고 있다. 매일같이 취해있을 정도라면, 죽어버리라지.
일시적으로 자신을 잊는다는 건, 이건 매력적입니다. 분명히, 이건 현실적으로 위대한 마술입니다. 옛날에는, 금 오십 전, 깔쭉깔쭉 한 장 꼭 쥐면, 신바시의 역 앞에서 컵의 술 다섯 잔을 마시고, 마법을 쓸 수 있었다. 최근에는, 마법을 쓰는 건, 쉬운 일이, 아닙니다. 다자이는, 마법사에 실격하지 않고, 인간에 실격한 겁니다. 라고, 생각하신 겁니다.
본래, 다자이는, 인간에 실격하지는, 않았다. 숙취에 얼굴을 붉히고 욱할 뿐이지만, 얼굴을 붉히고 욱하지 않는 놈들보다도, 얼마나, 성실히, 인간적이었는지 모른다.
소설을 쓸 수 없게 된 것이 아니다. 조금, 일시적으로, 완전히 M・C가 되는 힘이 약해졌을 뿐이다.
다자이는 분명히, 어느 종류의 사람들에게는, 어울리기 어려운 인간이었겠지.
예를 들면, 다자이는 내게, 문학계의 한 사람이 무심코 되어버렸는데, 어라, 어떡하면, 좋을까, 하고 물으니까, 상관없잖아, 그런 거, 내버려 두면 돼. 아아, 그래, 그래, 하고 기뻐했다.
그 후에, 사람들에게, 사카구치 안고에게 이렇게 일부로 풀이 죽은 척하니, 생각했던 대로, 대선배인 척 하며, 턱 가슴을 치며 상관없잖아, 내버려 둬, 래, 라며 유쾌하고 재미있게 말할지도 모르는 남자인 것이다.
많은 옛 친구들은 다자이의 이런 식의 방법에, 다자이를 싫어하며 멀어지고는 했으나, 물론 이런 방법으로 친구들은 상처받았음에 틀림은 없으나, 실상은, 다자이 자신이, 자신의 방식에 의해 내심 더욱 상처받으며, 얼굴을 붉히고 욱했음이 틀림없다.
본래, 이것들은, 그 자신이 그 작품 속에서 말하고 있듯이, 현재 눈앞의 사람에게의 서비스로 문득, 말해 버리는 정도의 것이다. 그 정도쯤의 것은, 같은 작가인 친구들이 모를 리는 없지만, 그렇다고 알고 있어도 불쾌하게 생각하는 사람이 그에게서 멀어진 것이겠지.
다만, 다자이가 내심 얼굴을 붉히고 욱하고, 자신을 천하게 여기고, 그 고통은 심각했을 것이다. 그 점에서, 그는 신뢰할 수 있는 성실한誠実漢이며, 건전한, 인간이었다.
그러므로, 다자이는, 좌담에서 문득, 이 서비스를 저지르고, 내심 얼굴을 붉히고 욱하게 되지만, 그것을 문장으로 쓰지는 않았다. 그런데, 다자이의 제자 다나카 히데미츠는, 좌담도 문학도 구별 없이, 이를 저지르고 있으며, 그 뒤에, 내심은 물론이오, 성대하게, 얼굴을 붉히고 혼란하고 욱하며 휘갈기고, 그것으로 당사자는 구제받은 기분을 느껴버리니, 어찌할 바가 없다.
다자이는, 그렇지는 않았다. 더, 정말로, 조심스럽고, 경건했고, 성실했다. 그만큼, 내심 얼굴을 붉히고 욱하는 걸, 끔찍이도 했을 테다.
그렇게 자신을 천하게 여기며 혼자서 괴로워하는 다자이에게, 술의 마법이 필수품이었던 건 당연하다. 다만, 술의 마법은, 숙취라는 향이 나지 않는 부속품이 있으니, 곤란하다. 불에 기름이다.
요리용의 술에는 숙취는 없으나, 마술용의 술에는, 그것이 있다. 정신의 허약기에, 마법을 사용하면, 계속해서 탐닉하게 되고, 그래, 이대로, 죽어버려도 좋아, 라고 계속해서 생각하게 되며, 가장 강렬한 자각증상으로는, 이제 일도 하지 못하게 됐어, 문학도 싫어졌어, 이게, 자신의 본심인 것 마냥 생각된다. 실제로는 숙취의 환청이며, 그리고, 병적인 환상 이외에, 이젠 일을 할 수 없다, 라는 절체절명의 상황은, 실제로 일어나지 않았다.
다자이와 같은 인간에게 능통한, 이것저것을 속속들이 다 아는 인간도, 이런 속된 것을 착각한다. 그럴 수도 있어. 술은, 마술이니까. 속되어도, 천박해도, 적이 마술이니까, 알고 있어도, 사람의 지혜로는 도달하지 못 하는. 로렐라이입니다.
다자이는, 슬프게도. 로렐라이에게 당하고 말았습니다.
정사情死같은 건, 새빨간 거짓말이야. 마법사는, 술을 마시며 여자에게 홀릴 뿐. 술 안에 있는 건 본인이 아니라, 다른 인간이다. 다른 인간이 홀려봤자, 본인은, 몰라.
무엇보다, 정말로 반해서 죽는다니, 넌센스야. 반했다면, 살아야 합니다.
다자이의 유서는, 꼴사납다. 엉망진창으로 취했던 모양이다. 13일에 죽는 건, 어쩌면, 내심 생각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어쨌거나, 인간실격, 굿바이, 그리고 자살, 뭐어, 넌지시 줄거리는 세워놨겠지. 내심 줄거리는 세워놨더라도, 반드시 죽어야만 하는 건 아니다. 반드시 죽어야만 한다, 그런 절체절명의 사상이라던가, 절체절명의 상황이라는 것이, 실재하지 않는 것이다.
그의 숙취적 허약이, 은밀한 줄거리를, 차례차례 피할 수 없는 것으로 한 것이겠지.
다만, 허둥지둥・삿쨩이, 싫다고 했다면, 실제로 일어났을 리가 없다. 다자이가 무지막지 취해서, 말을 꺼내서, 삿쨩이 그걸 결정적으로 만든 것이겠지.
삿쨩도, 술고래였을 터인데, 그 유서는, 존경하는 선생님을 모시고 따라가는 것은 과분한 행복입니다, 와 같은 정갈한 것으로, 전혀 취한 흔적은 없다. 다만, 다자이의 유서는, 서체도 문장도 형편없이, 방도 없이 술에 취했음에 틀림이 없어, 이것이 자살이 아니었다면, 어라, 어제는, 그런 짓을 했던가, 하고, 숙취의 얼굴을 붉히고 욱함이 있었을 테지만, 자살이었으니 다음 날 아침, 눈을 뜨지 못하여 글렀다.
다자이의 유서는 너무나도 형편없다. 다자이가 죽음에 가까웠을 시기의 문장이, 숙취적이었다고 해도, 어쨌거나, 현세를 상대로 M・C로 있었던 것은 분명하다. 무엇보다 ‘여시아문’의 마지막 회(4회째였던가)는, 심각하다. 여기에도 M・C는, 거의 없다. 있었던 건, 불평이었다. 이런 것을 씀으로 인해서, 그의 내면의 얼굴을 붉히고 욱함은 점점 심해지며, 그의 정신은 소모되어, 혼자, 삶이 힘들고, 슬펐을 것이로 생각한다. 다만, 그가 M・C가 아니게 되는 만큼, 가까운 사람에게서 갈채가 일어나며, 그 멍청함을 알면서도 지긋지긋해하며, 갈채한 사람을 목표로, 그것에 맞추어 행동했다고 한다. 그 점에서는, 그는 마지막까지 M・C였다. 그를 둘러싼 무엇보다도 좁은 원을 상대로.
그의 유서에는, 그 좁은 원 상대의 M・C조차도 없다.
아이가 범인凡人이라도 용서해줘, 라고. 부인에게는, 당신이 싫어서 죽는 게 아닙니다, 라고. 이부세 씨는 악인입니다, 라고.
그곳에 있는 건 만취의 부산함 뿐으로, 전혀, M・C는 없다.
그러나, 아이가 범인이라도, 용서해줘, 라는 건 슬프다. 범인이 아닌 아이를, 그가 얼마나 원했을까. 범인이라도, 자신의 아이가, 불쌍한 것이다. 그걸로, 됐잖아. 다자이는, 그런 당연한 인간이다. 그의 소설은, 그가 제대로 된 인간, 작은 선량한 건전한 정돈된 인간임을 알고서, 읽지 않으면 안 된다.
다만, 아이를 그저 측은히 여겨줘, 라고는 말하지 않고, 특히 범인이면서, 라고 말하고 있는 부분에, 다자이의 평생을 가로지르는 슬픔의 열쇠도 있었겠지. 즉, 그는, 비범非凡に에 홀린 적은 수의 허영꾼이었다. 그 허영꾼 자체가, 통속적이고 상식적인 것이나, 시가 나오야에 대한 ‘여시아문’의 불평 중에서도, 이것을 폭로하고 있다.
황족 중 하나가, 몸에 지니며 애독했다, 그것만으로도 됐잖아, 라고 다자이는 시가 나오야에게 덤벼들고는 있으나, 일상에서의 M・C의 뛰어난 기술을 잊는다면, 그는 통속 그 자체이다. 그것으로 된 것이다. 통속적이고, 상식적이지 않는다면, 어떻게 소설을 쓸 수 있는가. 다자이가 평생, 끝끝내, 이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묘한 갈채에 맞추어 숙취의 자학작용을 하고 있던 것이, 그것을 이루는 걸 방해했다.
재차 말한다. 통속, 상식 그것들이 아니라면, 뛰어난 소설을 쓸 수 있을 리가 없다. 다자이는 통속, 상식에 정직한 전형적 인간이면서도, 끝내, 그것을 자각하지 못했다.
인간을 명확히 결론짓는다니, 무리다. 그중에서도 심각한 것은, 어린아이라는 놈들이다. 느닷없이, 태어난다.
신기하게도, 내게는 아이가 없다. 느닷없이 태어나려던 때가 두 번 있었으나, 죽어서 태어나거나, 태어나서, 갑자기 죽거나 하였다. 덕분에 나는, 지금까지, 편하게 지낸다.
전혀 모르는 사이에, 이상하게도 배가 부풀어 오르거나, 갑자기, 그런 기분이 들거나, 부모 같은 마음이 들어, 그런 식으로 하여, 인간이 태어나, 자라는 것이니, 어처구니없다.
인간은, 절대로, 부모의 아이가 아니다. 그리스도와 마찬가지로, 모두 외양간의 변소 안 따위에서 태어났다.
부모가 없어도, 아이는 큰다. 거짓말입니다.
부모가 있어도, 아이는 큰다. 부모 따위, 바보 같은 놈이, 인간인 척하면서, 부모인 척하면서, 배가 부풀어서, 갑작스레 당황하고, 부모가 되어 버린 병신이, 동물인지 인간인지도 모를 이상한 연민을 가지고, 음침하게 아이를 키운다. 부모가 없다면, 아이는, 더 훌륭하게 커.
다자이라는 남자는, 친형제, 가정이라는 것에, 끔찍이 고통받은 기묘한 불량소년이었다.
태생이, 어떻다, 라는 지루한 말뿐, 지껄인다. 강박 관념이다. 그 결과, 그 녀석은 정말로, 귀족의 아이, 천황의 아이 따위였으면 좋았을 텐데, 하고 내심 생각하며, 그런 시시한 몽상이, 그의 은밀한 인생이었다.
다자이는 부모라던가 형이라던가, 선배, 장로라고 하면, 더없이 공손해진다. 그러니까, 그걸 해치우지 않으면 안 돼. 분했다. 다만, 확 껴안고 울어버리고 싶을 만큼, 애정을 품고 있었다. 이런 부분은, 불량소년의 전형적인 심리였다.
그는, 마흔이 되어도 여태 불량소년이었고, 불량청년도, 불량노인도 되지 못한 남자였다.
불량소년은 지고 싶지 않았다. 무얼 해서라도, 훌륭해 보이고 싶다. 목을 매어서 죽어도, 훌륭해 보이고 싶다. 황족이나 천황의 아이가 되고 싶은 것처럼, 죽어도, 훌륭해 보이고 싶다. 마흔이 되어서도, 다자이의 은밀한 심리는, 그 뿐인 불량소년의 심리로, 그 어리석은 짓을 진짜로 해내었으니, 지독한 녀석이다.
문학자의 죽음, 그런 게 아니다. 마흔이 되어도, 불량소년이었던 기묘한 병신이, 천 갈래 만 갈래로 찢어져, 마침내, 해내고 만 것이다.
정말, 웃기는 놈이다. 선배를 방문하여, 선배라고 말하며, 엄숙한 태도로, 찾아오고 만다. 불량소년의 의리였다. 예의 바른. 그리고, 천황의 아이처럼, 일본에서 제일, 예의가 바를 것처럼 군다.
아쿠타가와는 다자이보다도, 더 어른스러운, 영리한 얼굴을 하고, 그리고, 수재고, 침착하고, 순진했으나, 실제로는, 같은 불량소년이었다. 이중인격으로, 다른 하나의 인격은 호주머니에 단도를 집어넣고 잿날인지 뭔지에 휘청대며 걷다가, 소녀를 협박하여, 구애했던 것이다.
문학자, 더욱 심각한 것은, 철학자, 웃기지 마. 철학. 뭐가, 철학이야. 아무것도 없잖아. 사색이라고 지껄여대기는.
헤겔, 니시다 키타로, 그게 뭐, 어이가 없어서. 예순이 되어도, 인간 따위는, 불량소년, 그뿐이잖아. 어른 행세하지 마, 명상따윌 하면서.
무엇을 명상하고 있었는가. 불량소년의 명상과, 철학자의 명상, 무엇이 다른가. 들고 다닐 뿐, 어른이, 쓸데없이 손만 더 가지 않나.
아쿠타가와도, 다자이도, 불량소년의 자살이었다.
불량소년 중에서도, 특별히, 겁쟁이에, 울보 꼬마였다. 완력으로는, 이기지 못한다. 이론으로도, 이기지 못한다. 거기서 무언가, 증거로 삼아, 그 권위로 의해 자기주장을 한다. 아쿠타가와도, 다자이도, 그리스도를 증거로 삼았다. 겁쟁이 울보 꼬마 불량소년의 방법이었다.
도스토예프스키는, 불량소년 중에서도 꼬마 대장의 힘이 있었다. 그 녀석 정도의 완력이 있다면, 그리스도고 자시고 증거로 내세우지 않는다. 자신이 그리스도가 된다. 그리스도를 만들어내고야 만다. 이런, 마침내, 만들어내고야 말았다. 알료샤라는, 죽음의 직전에 드디어, 때에 맞았다. 그 전까지는, 지리멸렬했다. 불량소년은, 지리멸렬이다.
죽는다, 던가, 자살, 이라던가, 시시한 일이다. 졌으니까, 죽는 것이다. 이기면, 죽지는 않는다. 죽음의 승리, 그런 바보 같은 논리를 믿는 건, 할아버지의 무시키리 4를 믿는 것보다도 멍청한 짓이다.
인간은, 사는 것만이 전부다. 죽으면, 없어진다. 명성이든, 예술은 길도다, 바보 같은. 나는, 유령은 싫어. 죽어도, 살아 있다니, 그런 유령은 싫어.
사는 것만이 중요하다, 라는 것. 그저 그것만의 사실을, 모른다. 사실은, 안다든가 모른다든가의 문제가 아니다. 사는가, 죽는가, 그 두 가지밖에 존재하지 않는다. 또한, 죽는 쪽은 그저 없어질 뿐, 아무 것도 없지 않은가. 살아 보여서, 해내 보여서, 싸워내지 않으면 안 된다. 언제든, 죽을 수 있다. 그런 재미없는 짓은 하지 말아라. 언제든 할 수 있는 일 따위는, 하는 게 아니야.
죽을 때는 그저, 무에 돌아가는 것뿐이라고 하는, 그런 검소한 인간의 진정한 의무에 충실해야만 한다. 나는 이것을, 인간의 의무로서 본다. 살아있는 것만이 인간이고, 그 후에는, 그저 백골, 아니, 무無다. 그리고, 그저 사는 것만을 아는 것으로 인해, 정의, 진실이 태어난다. 생과 사를 평하는 종교인가 철학인가 따위에는, 정의도, 진리도 없다. 그건, 장난감이다.
다만, 살아 있으면 지치지. 이렇게 말하는 나도 때때로, 무로 돌아가고자 생각할 때가 있습니다. 싸워낸다, 말하는 건 쉽고, 지치지. 다만, 각오는 하고 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살아가는 시간을 살아 보일 것이다. 그리고, 싸울 거야. 절대로, 지지 않는다. 지지 않는다는 건, 싸운다는 겁니다. 그 외에 승부 같은 건 없다. 싸우고 있다면, 지지 않습니다. 절대로, 이길 수 없는 겁니다. 인간은, 절대로 이길 수 없습니다. 그저, 지지 않을 뿐.
이기고자 생각해서는 안 된다. 이길 수 있을 리가, 없잖아. 누구에게, 어떤 놈을 이기려는 거야.
시간이라는 걸, 무한으로 보면 안 된다. 그런 과장된, 어린애의 꿈같은 걸, 진심으로 생각하면 안 된다. 시간이라는 건, 자신이 태어나서 죽는 때까지의 간격입니다.
너무 과장되었다. 한계. 학문이라는 건, 한계의 발견에 있다. 과장된 건, 어린애의 몽상으로, 학문이 아닙니다.
원자 폭탄을 발견하는 건, 학문이 아닙니다. 어린애의 놀이입니다. 이것을 컨트롤하여, 적절하게 이용해서, 전쟁 따위 하지 않고, 평화로운 질서를 생각하며, 그런 한계를 발견하는 게 학문입니다.
자살은, 학문이 아니야. 어린애의 놀이입니다. 처음부터 우선, 한계를 알고 있는 게 필요하다.
나는 이 전쟁 덕분에, 원자 폭탄은 학문이 아니다, 어린애의 놀이는 학문이 아니다, 전쟁도 학문이 아니다, 라는 것을 배웠다. 과장된 것을 과대평가하고 있던 것이다.
학문은, 한계의 발견이다. 나는, 그것을 위해 싸운다.